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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도 옳다"

기사승인 [188호] 2020.02.10  21: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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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장만식 교수의 옛이야기 속 부부 심리>

지난번은 ‘서로 내 탓’이라는 제목의 이야기였습니다. ‘서로 내 탓’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족 모두가 승리하는 길, 행복해지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을 나눠봤습니다.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했듯이 부부가 한 몸이듯, 가족도 한 몸입니다. 뗄 수 없는 한 몸, 함께한 삶으로, 마음으로 한 몸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눌수록 기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더라도, 잠잘 곳이 좁더라도, 기쁨도, 슬픔도, 고난일지라도 함께 나눌수록 기쁩니다. 함께 먹어야 행복하고, 함께 입어야 행복하고, 함께 자야 행복합니다. 서로가 조금 덜 먹고, 덜 입고, 덜 편하게 자더라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잔다면, 오히려 불행한 것이 가족입니다.

어떨 때는 비록 서로 비교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깔보기도 하고,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은 같습니다. 가끔은 못 견딜 만큼 팍팍한 삶이기에 밖에서 밀리고 치이고 소외당한 상처를 풀어내기 위해 저도 모르게 짜증내고, 화내고, 소리치고, 싸우기도 합니다만, 언제나 돌아보면, 이것도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아니면, 대체 세상 어디서 이런 투정을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이겨 내어 살아보려는 사랑받고픈 어린아이 같은 투정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애틋하고 애잔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그래도 그리운 마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늘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언제나 함께 아픕니다. 한 몸 중 일부라도 상처를 입으면, 온몸 전체가 쑤시고 아파오는 것처럼 가족도 함께 아픕니다. 몸도 마음도 어느 것일지라도 아프지 않은 가족은 없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을지라도 어느새 마음으로 알고 함께 아파합니다.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함께 아파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족은 하나를 위해 전체가 조금씩 양보하려 합니다. 전체를 위해 하나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모자란다고, 말썽부린다고 핍박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몫이 적어진다고, 자신의 삶이 불편해진다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그럴수록 온 가족의 마음이 더 아파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더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행에 처한 하나가 덜 불행할 때, 그 불행을 함께 나누어질 때, 비로소 온 가족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함께해 온 삶으로 마음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그래서 한 운명체입니다. 함께 행복해지기도 하고, 함께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언제나 어느 하나만 행복해지거나 어느 하나만 불행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가족은 사랑이고,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네 말도 옳다’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서로 내 탓’ 이야기와 더불어 이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가족 모두가 승리하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번 더 함께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네 말도 옳다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림 / 송 영 주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학과졸업sfineart@naver.com

어떤 마을에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 선비 집에는 며느리와 딸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와 딸은 늘 티격태격하며 싸웠습니다.

하루는 저녁에 며느리와 딸이 빨래를 다리고 있었습니다. 딸이 빨래를 다리면서 별보다 달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별이 더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둘은 또 서로 자기가 옳다며 싸웠습니다. 한참을 싸워도 해결이 되지 않자, 딸이 먼저 선비에게 갔습니다.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달이 더 크지요?”
선비는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딸은 신나서 며느리에게 와가지고 말했습니다.  “거봐요, 내말이 맞다시잖아요.”

하지만 며느리는 못 믿겠다며, 직접 가서 물어보고 오겠다고 하며 씩씩대며 갔습니다. 딸도 덩달아 따라갔습니다. 그리하여 며느리도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별이 더 크지요?”
그러자 선비는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도 맞구나.”

“.......”

그러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선비의 부인이 말했습니다.

“아니, 달이 크면 달이 크다, 별이 크면 별이 크다고 해야지. 딸이 말하면 ‘네 말이 맞다’ 하고, 며느리가 말해도 ‘네 말도 맞구나.’ 하면 어떻게 해요?”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비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
자네 말도 맞네 그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모두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렇게 선비 가족은 오래오래 웃으면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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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무슨 말이든 그것에 이유가 없겠습니까? 처녀가 애를 가져도 할 말이 있다는 말처럼, 핑계 없는 무덤도 없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것에나 사연이 있습니다. 다 그 처지와 입장에서, 그 마음에서, 생각에서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일리가 당연히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떤 일이, 무슨 말이 누구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가름할 수 있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거의 아니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자기 삶의 경험과 배움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삶 속에서 얻은 지식과 깨달음, 지혜, 삶의 가치 등으로 각자 자신만의 색안경이 만들어지고,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삶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더군다나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옳은 길, 유일한 길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정답이 있겠습니까? 오직 그 모든 것의 판단은 신의 몫이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 아니더라도, 철두철미한 이성과 강고한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삶이란 불완전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무언가 쫓기듯이 옳은 선택에 내몰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누가, 어떤 것이 옳다고 결정한 후 곧바로 합리화에 돌입합니다. 완벽한 결정인 듯이, 절대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의 처지와 입장, 바라보는 관점에서만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가장, 최선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결정, 선택을 합리화하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상대가 바라보는 쪽에서도 옳은 것이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한다면, 자신만이 옳다고 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옳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보기에 옳은 것이 상대가 보기에는 옳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누구도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입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처지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상대적으로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틀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누가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무엇인가를 위해 ‘옳아야만’ 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래서 상대의 생각과 마음을 꺾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되어 생각해 보고 느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성(性)을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기에, 마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사람은 모두 하나이기에,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마음이기에, 남을 자기처럼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맹자를 다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내 가족과의 일에서는 그렇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내 아내, 내 남편, 부부의 일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삼십여 년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았기에, 너무나 다른 부모와 그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았기에 부부는 아마도 많은 부분이 전혀 다를 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부부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이 같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인 시공간, 심리적인 시공간까지도 같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의 경험도, 배움도, 깨달음도 같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일지라도 이삼십여 년의 삶은 최소한 그만큼의 생각과 마음의 차이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천생연분일지라도 그 차이가 그리 작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만치 않았을 게 뻔합니다.

그러니 이삼십여 년 각자의 삶 속에서 몸에 밴 생각과 마음의 차이를 그리 쉽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리 쉽게 극복하기도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비록 상대에게 맞추어 배려하고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상대가 흡족할 만큼일 수는 없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넓은 마음으로써의 아량, 상대에 대한 예의, 존중과 배려, 이해와 용서 등사랑이었을 겁니다. 비록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그 나머지를 채웠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멀찌감치 서서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아집과 독선은 아닐지라도 어떤 일에 있어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만 판단하려고 한 점은 없는지 숙고해 봐야겠습니다. 상대의 넓은 마음으로써의 아량이 아니었다면, 자신에 대한 예의나 존중과 배려, 이해와 용서 등 사랑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은 없는지 깊이 반성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사랑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받기만 하는 사랑은, 주기만 하는 사랑은 그다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다지 오래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은 특히나 부부는 더더욱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굳이 들추고 꺼내어 상대를 거꾸러뜨리고자 한다면야, 어느 경우인들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입니다. 못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서로서로 감싸고, 눈감아 주며, 보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부가 더 나아가 가족 전체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못마땅해도, 부족해도 감싸주고, 보듬어 주고, 메워주며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광대한 우주에서, 그런 우주에 비하면 티끌만한 지구별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렇게 만나 사는 것도 찰나의 짧은 삶인데 꼭 그렇게 고깝게 보고 꼬집어야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하고 아껴 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서로 반갑고, 고맙고,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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