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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

기사승인 [190호] 2020.02.10  2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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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과연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인가?

<장만식 교수의 옛이야기 속 부부 심리>

지난번은 ‘네 말도 옳다’라는 제목의 이야기였습니다. ‘서로 내 탓’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 이야기는 진정으로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가족 모두가 승리하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부부가 한 몸이듯, 가족도 뗄 수 없는 한 몸이기에 혼자만이 옳고, 혼자만이 승리하면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봤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난도 부부를 비롯한 가족이 함께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혼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잔다면 오히려 불행한 것이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는 ‘친구’가 많다고 자부하는 자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친구’, 또는 ‘진정한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자녀들만의 ‘친구’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관계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족이나 부부 사이의 관계 문제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는 우리와 자녀 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친구
 나는 과연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인가?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커서 청년이 다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도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아들을 보며 내심 흐뭇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아들은 거의 매일매일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아들은 친구들이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술도 마시고, 사냥도 하고, 멀리 여행도 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정말 좋은 친구가 자기한테는 아주 많다고 아버지에게 자랑하며 떠들어 댔습니다. 정말로 아들은 늘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늘 바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자,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가끔 마주칠 때마다 아들은 정말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도 했습니다. 하지만 별로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아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나갔기 때문입니다. 아예 들어오지 않은 날도 많아질 정도로 도무지 집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켜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아들아, 아버지랑 내기 한번 안 할래?”
“무슨 내기요?”
“으응, 누가 더 진실한 친구가 많은지 말이야. 내기에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때?”
“으잉? 진실한 친구?”
“응.”
“어떻게요?”
“하하하.”
“.......”
“겁나지.”
“겁나긴요. 내가 친구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이길걸요.”
“그래 좋아, 그럼 하는 거다.”
“그래요. 뭐. 하하. 내가 이길 건데, 뭐.”

아들은 의아해했지만, 아닌 척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먼저 돼지를 잡아 자루에 넣고 멍석으로 둘둘 말아 지게에 실었습니다. 그런 후, 아들에게 짊어지게 했습니다.

“.......”
“자, 이 지게를 지고, 친구들에게 가면 돼.”
“그래서요?”
“가서, 내가 어떻게 하다가 사람을 죽였는데, 같이 묻으러 가자고 부탁하면 돼.”
“아, 그렇군요. 그거 좋네요. 하하하.

아들은 제일 먼저 제일 친한 친구에게 갔습니다. 집 앞에 가서는 문을 두드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습니다. 예상대로 친구는 급하게 나왔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친구가 나오자마자 아들은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야, 큰일 났어. 내가 어떻게 하다가 사람을 죽여 버렸어. 네가 도와줘야겠어.”
“어엉,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하다가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묻어 버려야 해.”
“…….”
“좀 도와줘. 부탁한다.”
“???”

그림 / 송 영 주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학과졸업sfineart@naver.com

아들 친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다 당황스럽게 말했습니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사람을 죽이다니? 이거, 진짜 큰일이네.”
“그래 정말 큰일 났어. 네가 도와줘야 해.”
“…….”
“친구야, 도와줘.”

아들은 다시 한 번 힘주어 사정을 했다. 하지만 아들 친구는 망설이기만 했다. 한참을 자루 옆을 서성거리기만 한 친구가 이내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도와줄 수 없어.”
“…….”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그런 일은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다 발각되면 나까지 큰일 나.”
“…….”
“미안해.”

그러자 아들은 당혹스러웠다. 첫 번에 성공해 아버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들 친구는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들은 제일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가 이렇게 나오자 몹시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은 또 다른 아주 친한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 집 문 앞에 도착한 아들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친구야.”
“…….”
“친구야, 나야 나.”

잠시 후, 친구가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니? 이 밤중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다 사람을 죽여 버렸어.”
“어엉.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쩌다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네가 좀 도와줘야 해.”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뭘 도와줘?”
“이 시체를 묻어 버리려고,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
“빨리 나와. 동트기 전에 묻어 버려야 해.”
“하이구, 이거 진짜 큰일이네. 어떡하지?”
“뭘 어떻게? 도와줘.”
“…….”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돼.”
“…….”

하지만 친구는 꼼짝할 태세가 전혀 아니었다. 아들은 친구가 망설이자 이번에도 실패하면 안되는 데 하면서, 친구에게 더욱 사정사정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발을 동동 구르고 매달리며, 너밖에 없으니 제발 부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도 어떻게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이 친구도 첫 번째 친구처럼 한참을 자루 옆을 서성거리다, 이내 내정하게 말했습니다.

“야, 네가 죽였으며 네가 책임져야지. 왜 나까지 못 살게 구니?”
“…….”
“난 안 되겠다. 네가 알아서 해.”
“야! 너 이러기냐?”
“…….”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너와 나 사이에.”

하지만 친구는 말하자마자 쏜살같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아버지는 다가와 다른 친구들에게도 가 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이제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집을 하나씩 하나씩 방문해 봤습니다. 역시나 하나같이 거절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면서 들어가더니,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맥이 탁 풀리며, 풀이 팍 죽었습니다.

이젠 아버지 차례입니다. 아버지도 지게를 지고 친구 집 문 앞에 도착하자, 문을 두드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이 여보게 친구. 여보게 친구.”
“…….”
“여보게 친구.”

소리가 없자 아버지는 더 큰 소리로 친구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아버지 친구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문을 벌컥 열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웬일인가? 무슨 일이 있는가?”
“여보게 큰일 났네. 내가 어쩌다가 사람을 죽여 버렸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아버지 친구는 일단 얼른 들어오라고 말하며, 다시 천천히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여 버렸다네. 이 지게에 실린 게 죽은 시체라네.”
“이거 큰일 이구만, 큰일이야.”
“…….”

아버지는 일부러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친구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보게 친구.”
“…….”
“이거 큰일 났구만. 잠시만 기다리게, 천천히 이야기하며 방도를 찾아보세.”
“아이고 고맙네. 하지만 동이 트기 전에 얼른 묻어야겠네. 얼마 남지 않았네.”
“…….”
“사람들이 보면 일이 더 커질지 모르잖나.”
“그렇군. 그럼 이렇게 하세. 일단 우리 집 뒤에 있는 밭에 묻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
“정말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괜찮겠나?”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내가 다 생각이 있네. 그려”
“하이고, 정말 고맙네. 하하하. 하하하”
“…….”
“하하하. 하하하.”

갑자기 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자, 아버지 친구는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가 지게에서 돼지를 내려 보여 주자, 아버지 친구도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두 친구는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이고, 이 사람아. 이렇게 사람을 놀리면 어떡하나. 간 떨어질 뻔했네.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구만. 하하하.”
“미안하이. 미안해. 우리 아들 때문에 그랬다네.”
“하여튼 십년감수했구만. 하하하.”

아들은 머쓱하여,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묵묵히 지켜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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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정한 친구’ 이야기는 우리들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족이나 부부 사이의 관계 문제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는 우리와 자녀 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말이 ‘親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는 뜻이고, 벗, 동반자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자신보다 많든 적든, 성별과 나이 등의 차이를 넘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정을 나누며 ‘친한 사이’, ‘친구’, ‘벗’, ‘동반자’가 되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짧든 길든 이러한 사람들 모두를 넓게 보아 ‘친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인연들을 만납니다. 아니 만나 사귀고 싶어합니다. 몹시 목마른 사람처럼 갈망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래 실존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원해서 온 것도 아닌데다 삶이라는 망망대해에 툭하니 떨어져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홀로 방황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심심하고 외로운 인생의 길에 동반자가 돼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친구’를 갈망합니다. 더더욱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정작 “지금 나는 어느 누구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면서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라는 물음에는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나부터도 그런 진정한 친구가 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못할 고민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고 진실한 공감과 위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말입니다. 더군다나 더더욱 고민해 봐야할 것은 내가 과연 내 아내, 남편, 형, 동생, 자녀, 부모 등등 가장 가까운 피붙이인 가족 모두에게 그런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에겐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식 걱정이 제일입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순간순간 물가에 아기를 내놓은 것처럼 애가 탑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머물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나이가 차,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커다랗게 성장했지만, 마음은 늘 걱정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부부는 자식이 자신들을 대신할 만한 진정한 친구, 가장 소중한 동반자, 진실한 짝을 찾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친구’ 이야기에서처럼 아무리 살인을 저지르고 왔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찾기 바랍니다. 언제까지나 부모가 함께해 줄 수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 특히나 슬플 때 함께 울며 다독여 주는 속 깊은 친구, 힘겨운 일, 괴로운 일도 마다 않고 도움 주는 그런 친구가 곁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 이야기에서처럼 자식은 그런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호기를 부립니다.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부모는 압니다. 어느 누구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부모는 자식의 넘치는 자신감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자식의 인생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쉽지 않은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자식만큼은 책임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서라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식을 위해 정작 감당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삶의 무게조차도 이를 악물어 버티어 내려고 합니다. 보듬고 감싸며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품안에 감싸쥐고 있을 순 없습니다. 막을 수도, 억지로 끌어 앉혀 잡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좋은 말도, 애원마저도 무용지물일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기껏 마련한 어떠한 대비책마저도 헛수고가 되기 마련이고,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어찌할 수 없어 더욱 괴로운데도, 어찌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은데도 자식은 순순히 따라주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켜버릴 때가 있어 부모는 그것마저도 조마조마합니다.

옛날부터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식이 점점 어른이 될수록 부모는 급속히 늙어 갑니다. 어떻게 잘 헤쳐 나갈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식의 인생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쉽지 않은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실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리에 맡겨야 합니다. 본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존중하고 맡겨야 합니다. 인생은 다 각자의 몫입니다. 본인이 주인이고 그 책임 또한 본인이 지는 것입니다. 주인답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할 뿐입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가 주지 못합니다. 책임져줄 수도 없습니다.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이상 해줄 수 있는 것도 사실 없습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도 그래서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삶과 의무, 책임 등은 오롯이 본인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은 기다림일 뿐입니다. 자식이 스스로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믿고 인내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늘 간직하고, 그 마음으로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도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바칠 뿐입니다. 정말로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괴롭고 슬플 때, 외로울 때 도와 달라고 예수님, 부처님, 천지신명에게 기도할 밖에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아들러의 말처럼 그것밖에는 사실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가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식은 스스로의 삶을 혼자 힘으로 살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만끽하며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속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부모는 자식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과 마음으로 서로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하나입니다.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피’로도 하나이고, 함께한 ‘삶과 생각과 마음’도 크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더욱 홀로 있지 않습니다. 늘 하나입니다.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 하나입니다. 가족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그 속에서 중심인 부부도 늘 하나입니다.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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