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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다"

기사승인 [192호] 2020.04.28  17: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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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식 교수의 옛이야기 속 부부 심리>

지난번은 ‘조신의 꿈’이라는 제목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부 모두 서로에게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펼친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신의 꿈’ 이야기에서처럼 전혀 반갑지 않은 ‘이별’을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만났지만,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의 고통스러움, 가족 간의 갈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짐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오비이락(烏飛梨落)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앞뒤에 펼쳐진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이 이야기를 첨가해 원형에 가깝게 들려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조신의 꿈’ 이야기와 더불어 부부의 만남과 헤어짐, 가족, 인생 등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다
-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옛날, 아주 먼 옛날이었습니다. 어느 마을 근처 산기슭에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배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산들바람이 불어 잎들이 가볍게 흔들리자, 도란도란 정다운 소리도 들리는 듯했습니다. 늘 배나무엔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날에도 ‘푸드드득’ 날아와 앉아 가만히 깃털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까악까악’, 갑자기 까마귀가 날아오르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까마귀조차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날아오르자마자 어디로 갔는지, 이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까마귀 탓만도 아니었습니다. 바람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툭.’

커다랗게 익은 배 하나가 ‘툭’하고 떨어졌던 것입니다. 까마귀가 앉아 있던 바로 그 가지에 달려 있던 배였습니다. 그날따라 더 크게 흔들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떨어질 때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무심히 ‘툭’하고 떨어졌기 때문에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림 / 송 영 주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학과졸업sfineart@naver.com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필이면 그때, 바로 그 아래, 무성한 풀 사이로 뱀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유유히 평소와 같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늘 지나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위험하지도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었겠습니까.
커다란 배가 자신의 머리에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까마귀가 날자, 그 바람에 떨어진 배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은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세월을 통해 모든 것을 감춰 버립니다. 모든 것이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졌습니다. 까마귀도 뱀도 모두 잊혀졌습니다.

모든 것이 잊혀진 뒤, 까마귀는 꿩으로 태어나고, 뱀은 멧돼지로 다시 태어납니다. 어느 날, 꿩은 산자락 풀숲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풀숲에 둥지를 튼 꿩은 얼마 전 알도 낳았습니다. 알을 품고 있는 꿩은 매일매일 분주했습니다. 아침 일찍 햇살을 따라 산을 내려가 먹이를 얼른 잡아먹고서는 다시 급히 올라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날은 근처 모래흙 속에서 모래 목욕도 했던 흔치 않은 호사도 누렸습니다. 벌써 하루가 지나고 늦은 오후가 되었습니다. 꿩은 묵묵히 알을 품고 앉아 있었습니다.

“꿰엑 꿱!”
“…….”
“치梁梁梁◐….”

그때였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바위에다가 몸을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꿩의 둥지 바로 위였습니다. 어딘가가 가려웠는지 사정없이 바위에 몸을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바위는 멧돼지의 움직임에 따라 춤을 추듯 들썩거렸습니다.

“쿵-썩!”
“꿰엑 꿱.”
“치梁梁梁◐.”
“쿵-썩!”

아슬아슬했습니다. 구를 듯 말 듯 자못 위태로웠습니다. 멧돼지가 이렇게 바위와 한참을 씨름하고 있었지만, 꿩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멧돼지도 꿩이 위태로운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려운 몸을 마냥 긁을 뿐이었습니다.

“빠지직.”
“툭, 툭”

얼마 후, 바위 주변의 겨우 버티고 있던 나무와 잔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굴렀습니다. 그 순간에도 꿩은 전혀 모른 채 꿈쩍도 않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쿵쩍. 쿵쩍!”
“…….”
“쿵쩍. 쿵쩍!”

굉음을 내며 결국 위태롭게 있던 바위가 아래로 굴렀습니다. 거칠게 굴렀습니다. 다른 작은 바위들과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구르는 방향에 있던 잔나무들과 가지들은 모조리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바위는 굴러굴러 결국 꿩의 둥지를 덮치고 말았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꿩은 알과 함께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멧돼지도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위가 구르면서 부딪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도망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고, 모든 것이 또 잊혀졌습니다. 멧돼지는 다시 죽어서 사슴으로 태어나고, 꿩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소년이 되어 사냥을 하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어느 날 멀리 사슴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올커니’

소년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숨을 죽이고 목을 겨누었습니다. 단번에 숨통을 끊을 셈이었습니다. 그때, 그때였습니다. 소년을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습니다.

“애야.”
“…….”
“애야.”

그래도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집중해야 할 때였습니다. 정확히 겨눠 단번에 맞춰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급하게 소년을 부르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습니다.

“애야. 애야.”
“…….”
“애야. 애야.”

소년은 몇 번을 더 부르는 소리를 더 듣고서야 돌아봤습니다. 뒤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스님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뒤에까지 와서 다급히 소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년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목소리였습니다.

“소년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
“쉴 새 없이 이어진 악연의 고달픈 삶의 길에서 이젠 쉬거라.”
“…….”
“여기서 멈춰야 하느니라.”

소년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스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님의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에 마음이 통했는지 소년은 천천히 활을 내려놓았습니다. 소년이 활을 내려놓자, 스님은 손을 잡아끌어 소년을 안았습니다. 등을 ‘토닥토닥’ 토닥거리며 스님은 한참 소년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 후, 소년은 스님을 따라갔습니다. 소년과 함께 길을 가는 동안, 스님은 세월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물고기를 잡아먹다가 바위에 갈려 죽은 새끼 곰과 원통한 엄마 곰이 까마귀로 태어난 이야기로부터, ‘오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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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예기치 않은 시기와 질투 또는 불이익, 미움을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이유도 없이 괜히 시기하고, 질투하고, 불이익을 주고, 미워한 적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살이 속에 다반사로 있는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그렇습니다.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꺼려지고, 동의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그런지 모르게 우리 자신을 배척하고, 발목을 잡고, 누르려고 하고, 괴롭히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리고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랬을까요? 한참을 지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의 하나하나, 순간순간들이 어디 우연히 벌어지는 법이 있나요? 우리들의 삶 어느 것 하나 그냥 일어나는 경우가 어디 있기나 하느냐 말입니다. 삶 구석구석에 깃든 우주의 섭리가 우리들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득하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하나, 한 생명 한 생명을 위한 우주의 섭리에 의해 우리 삶은 생명을 얻고, 자라고, 또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는 생명, 우리 삶의 모든 것에는 그 이유와 목적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우주적인 차원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소용돌이치는 삶의 질곡에도 그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모든 경우가 단순히 각 개개인의 탓, 각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각자가 본성에 따라 나름대로 그냥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 결과가 엉뚱하게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 뜻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을 뿐인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될 것인지에 대하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중에라도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예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우리의 뜻과 마음과 다르게 벌어져 버렸던 겁니다.

바로 이야기 속의 까마귀처럼 말입니다. 까마귀도 단지 날아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잘 달려 있던 배가 떨어져버린 것일 뿐입니다. 그냥, 우연히 말이죠. 그런데 하필이면 뱀의 머리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재수 없게, 더럽게 재수 없게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 긴 인연의 고리는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까마귀와 뱀, 둘은 그것으로 옭아매어져 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그렇게 얽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를 죽이고, 죽고,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삶의 질곡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왜 서로를 죽이는 줄도 모르고, 상처 주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대신하겠습니까? 자신이 이 삶의 주인인 것을, 이 삶의 질곡의 주인인 것을…. 오직 자신만이 이 삶의 질곡의 소용돌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을….

그러니 이젠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해야 합니다. 이 질곡의 영원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젠 벗어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피할 수도 없는 쳇바퀴 같은 소용돌이에서 내려와 이 질곡의 속박과 굴레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삶의 자유로움과 행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못 막막할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애’가 아니라 ‘소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눈을 질근 감고 참았던 ‘소년’처럼, 꼭 한 번은 참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끊을 수만 있다면, 이 질곡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두 번 세 번이라도 용기를 갖고 도전해 봐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도 쏟아내어 버티어도 보고 멈추려고도 해 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만큼 어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한순간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잘 먹으면 너무도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먹기가 제일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계속 질곡의 삶을 살 것인가? 끝도 없는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릴 것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한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한순간 먹은 당장의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믿고 바라고 사랑하십시오. 믿고 바라고 사랑하면 꼭 이뤄집니다. 믿음대로 바라는 대로 사랑하는 대로, 믿음만큼 바라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꼭 이뤄집니다. 우리 부부, 가족 간의 어렵고 힘들 삶, 갈등, 이별 등 모두가 다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인연, 필연 같은 인연의 고리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분명한 것은 우리의 결단만이 우리 부부, 가족의 행복을 틀림없이 가져다 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족은 사랑이고, 하나입니다. 부부와 함께 가족 모두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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