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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글> 지게 위의 뻐꾸기

기사승인 [199호] 2020.05.22  12: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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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게 위의 뻐꾸기>

앞산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면 아버지가 그립다. 밤골 다랑논과 저수지가 꿈결처럼 떠오른다. 푸른 안개 속에서 지게 위에 앉아 아버지의 뻐꾸기 노래를 듣고 싶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뒷밭으로 올라가고  그 길을 따라 뒷동산에 오른다. 아득히 먼 구름 사이로 고향이 보인다.

뻐꾸기가 울면 고향에선 모를 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밤골 다랑논에 물을 층층히 대어 놓고 논두렁 손질마저 끝마쳤다. 모를 내는 날, 아버지는 이른 아침 리어카에 지게를 얹어 놓고 파란 모춤을 가득 실어 놓고는 그 위에 널빤지를 얹어 놓고 싱글벙글하셨다.
할머니가 오늘은 누에가 석 잠을 잘 자게 똥을 갈라 놓는다고 하며, 잠실 방에 팥 방구리 쥐 드나들 듯 하는 나를 데려 가라고 아버지에게 미리 언질을 놓으셨나보다. 아버지는 내 주머니에 왕사탕 한 주먹을 넣어 주시고, 번쩍 들어 리어카 널빤지 위에 얹어 놓고 밤골로 향했다. 신작로를 지나, 코를 벌름거리며 꽃향기를 맡으며 산길로 들어서니,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언덕 아래에 이르러 아버지는 리어카를 세우고 지게를 꺼냈다. 꽃다지 밭 위에 지겟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고 지게 꼬리를 지게 회장에 단단히 동여맨 다음 나를 안아 얹었다. 두 손을 꼭 잡게 하고는,
“출발이다.”
하시며 지겟작대기를 짚고 일어나셨다.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 지겟다리에서는 검은 항고가 달랑거렸다. 뻐꾸기가 또 울었다. 나는 뻐꾸기를 따라, ‘뻐꾹 뻐꾹’ 했다.
아버지는,
“계집 죽고 내가 뻐꾹, 새끼 죽고 뻐꾹, 논밭전지 다 뺏기고, 뻐꾹 뻐워꾹,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뻐꾹 뻐꾹.”
아버지가 논두렁을 손질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배운 노래다.
한 삽 떠서 논두렁에 올리고, ‘뻐꾹’ 두 삽 떠서 논두렁에 올리며 ‘뻐꾹 뻐어꾹’.
어느새 언덕길 위로 안개 자욱한 저수지가 보이고 다랑논이 올망졸망 눈에 들어왔다. 윗 논은 저수지였다. 낮은 저수지 둑에서 바라보면 물 위에 산벚꽃이 동동 떠다니고 노란 송화 가루는 마치 융단을 펼친 듯했다. 둑길엔 쇠뜨기, 할미꽃, 제비꽃, 메꽃, 온갖 풀꽃이 피어있었다.
저수지 옆 버드나무 밑에 널따란 바위가 있고 그늘은 내가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버지가 방석바위에 나를 내려놓기 바쁘게 도로 내려와 꽃을 꺾었다. 방석바위에 꽃을 펼쳐놓고 소꿉놀이를 하면서 ‘뻐꾹 뻐어꾹’ 흉내를 내면 먼 산에서도 ‘뻐꾹뻐꾹’ 화답했다.
이때쯤 아버지는 개울가로 걸음을 옮겼다. 매장나무 그늘 아래에 고기가 모이게 웅덩이를 파고 돌로 연못을 만들었다. 보자기를 매장 나무에 걸어 놓고 검은 항고를 물에 담가 두었다. 간식인 감자와 고구마를 주시고는 뱀이 있으니까 풀숲에 가지 말고 바위에서만 놀라고 하신다. 심심하면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보라고 하셨다. 그것도 염려되어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라고도 하셨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뻐꾸기 노래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아버지가 선창을 하셨다.
“계집 죽고”
하시면 내가
“뻐꾹”
아버지가
“새끼 죽고, 논밭전지 다 뺏기고”
길게 부서진 소리를 하면,
“나 혼자 어찌 살라고...”
사이사이에 ‘뻐꾹’ 소리는 내가 후렴을 했다. 그제야 손을 풀어주면, 아버지는 논두렁에서 부채처럼 접혀져 있는 지게 소쿠리를 갖고 오신다. 그리고는 그것을 펼쳐서 지게에 얹은 후 지게를 지고 다시 내려가신다.
모를 잔뜩 지고 언덕길을 올라오셔서 모춤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도 내 한 손에는 산 목련 한 송이를 쥐어 주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실 때마다 산딸기를 따서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물 빠진 다랑논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맥고자가 달랑거렸다. 손모를 얼마나 빨리 심으시면 모자가 흔들거릴까. 한나절까지 반도 넘게 심으셨다. 그때는 손놀림같이 뻐꾸기도 빠르게 ‘개개개’ 하는 것 같았다.

아카시아 향기가 바람에 흩날린다. 어디선가 뻐꾸기가 운다. 불현듯 눈앞이 아른거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게가 다랑논 논두렁에 세워져 있다. 해질녘 분꽃이 붉게 피어날 때 어머니는 토방에서 밀국수를 삶아내셨다. 엄마 곁에서 놀다가도, 쇠꼴 속에서 두어 송이 산 목련이 흔들리면, 달음질쳐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쇠꼴 속에선 찔렁도 시겅도 산딸기도 나왔다. 아 , 그 속에서 뻐꾸기도 나올 것 같았다. 뻐꾸기를 잡아 달라고 떼쓰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지게에 가보라고 하셨다. 신이 나서 내달으면 따라오셔서 뻐꾸기는 여름 철새로 칼새가 되어 멀리 날아갔다고 ‘꾸룩꾸룩’ 하시며 날개 짓을 하셨다. 칼새가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움츠려 들었었다.

이제 어른이 되어 뻐꾸기의 노래가 슬펐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어른들이 지어낸 가사는 일제 압박 시대의 서러움을 담은 노래였지 싶다. 뻐꾸기가 자기 새끼를 붉은 머리 오목눈이 집에 두고, 어미 노릇 못하는게 서러워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는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고 애타게 독립운동을 했듯이...항간에서는 뻐꾸기 소리를 ‘복국복국’ 이라하며 나라 찾는 뜻을 담아서 불렀다고 한다.
우리는 김소월이 보습댈 땅조차 없다고 한탄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다행히 풍요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감자 범벅이 양식이래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산과 들, 실개천, 풀꽃, 새소리, 자연을 즐길 수 있었고, 열매를 따먹어도 아픈 곳 없던 시절, 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들으며 잠들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뻐꾸기가 울 때 친정에 가도  손모를 심는 집은 없다. 다랑논도 저수지도 지게도 없다. 아버지가 늙으시기도 하셨지만 지게쓸 일이 없다.
트랙터 콤바인이 농사일을 다 한다. 시골길이 좋아져 논길에도 밭길에도 자동차가 다닌다.
참으로 편한 세상이다. 내 눈에는 아버지가 한 삽 두 삽 흙을 퍼 올리던 논두렁이 떠오른다. 백발의 아버지가 나를 향해 걸어오신다.
‘이제는 아버지를 내가 내 등에 업어야 되련만.’

순간, 젊은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어린 나는 지게 위에 앉아 “뻐꾹 뻐꾹” 노래를 한다.


 

최보정 작가
현/ 횡성시낭송협회 회장, 시낭송 및 창작지도 강사
강원도 양구 출생.
<월간 문학><문예운동><수필과 비평> 신인상 시, 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협낭송발전위원회 위원, 강원문인협회 회원, 문학세계 회원
저서/ 시집 “숲은 물소리만 스쳐도 흔들린다” 수필집 “달에 집짓기” 외 공저 다수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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