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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행여나 잊혀질까 두려운 인연(1)

기사승인 [202호] 2020.06.30  16: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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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軍 한국전쟁 참전 용사 팀 보스(Tim vos)의 한국 사랑

네덜란드사람으로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팀 보스(Tim vos)는 2020년 4월 93세로 별세했다. 신학기 박사 가족은 농촌진흥청 연구원으로 네덜란드에 근무할 때 알게 된 팀 보스와의 인연으로 귀국 후 10년째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이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우천면에 있는 네덜란드 참전기념탑을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올해 현충일에 네덜란드 참전 기념탑에서 헌화하는 신학기 박사를 목격한 시민기자에게 신학기박사는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네덜란드 軍 참전 용사 팀 보스(Tim vos)” 이야기를 들려줬다. 팀 보스의 뜨거운 한국사랑 이야기를 신학기 박사가 직접 전한다. <최상환시민기자>

행여나 잊혀질까 두려운 인연(1)

글. 사진 신학기

농촌진흥청 농업연구관, 네덜란드 WUR 상주연구원, 화훼과장, 수출농업지원과장, 원예작물부장, (현)기후사업단 기후적응연구단장

한국전쟁 70주년,

혈기왕성한 20세에 입대한 국내외 참전용사들의 나이가 벌써 90세가 되는 해. 노병들의 연세로 보아 마지막 10주기 행사일 듯하다. 정부에서는 올해도 많은 보은의 행사를 기획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뜻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할 듯하다.
벌써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어버릴까 못내 아쉬운 사연들을 기억 더듬으며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 작성한, 특히 나의 집사람, 최서열 여사의 사연이다.

* 최서열 여사의 개인 블로그 ‘Welkom bij seoyeoul’s blog. 네덜란드 생활-나의 이야기’에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작성하였다.

 

● 키 큰 네덜란드 할아버지, Tim Vos와의 첫 인연

참전용사 팀 보스 Tim Vos(네덜란드명 Tijmen Vos,. 1928.10.24~2020. 4.7)

2009년 6월 10일, 네덜란드 WUR(Wageningen University and Research Center)의 농촌진흥청 초대 상주연구원으로 첫 발령을 받고, 집사람과 대학생인 두 딸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황급히 이삿짐을 싸서 정착한 곳은 독일 국경에 인접한 네덜란드 와게닝겐(바흐닝헌) 인근 Bennekom 이었다.

아직 한국교회를 찾지 못해 두 번째 네덜란드 교회에 참석하던 날(2009.6.28.). 예배가 끝나고 웬 할아버지가 큰딸(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I am a korean’이라며 접근한 할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였으며, 반가워서 보내주지도 않고 말을 계속하는 데, 한국전에서 친구를 15명 잃었다며 눈물을 글썽이셨고, 집에도 초대해 주셨는데, 자동차에 태극마크를 부착한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듯 하였다.

네덜란드에 도착하여 협력기관과의 업무협의, 대사관 방문, 시청주민신고, 은행계좌 개설, 자동차 등록과 운전면허 발급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7월 11일 오후 2시에 약속을 하고 참전용사 Tim Vos(네덜란드명 Tijmen Vos, 1928년 10월 24일생) 할아버지 댁을 처음 방문하였다. 알려주신 주소에 10분 일찍 도착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집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셨다.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숨을 헐떡이며, 또 땀을 훔쳐가며 당신의 한국이야기를 오랫동안 하셨다. 한국전 당시의 지도, 전쟁사진, 한국아이들, 흑색군복, 관련 책자와 엽서 등.

이야기 중에 한국인 명함(곽경찬)이 있었는데, 통화하고 싶다고 하셔서 연결을 시도했는데(한국시간 밤 11시 반쯤), 알고 보니 한국전 당시 네덜란드 부대에 학도병으로 근무하셨던 참전용사 이셨다. 네덜란드에 몇 번 방문하셔서 옛 동료들을 만난 적이 있고, 한국을 방문하는 친구들도 여러번 안내를 하셨다는 말씀이셨다.

집에 돌아와서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해서 한 달에 한번쯤은 들러서 위로를 드리자고 가족이 다짐했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은 불가능하였으니, 할아버지께서 수시로 연락하시고,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자동차 사고를 당해 한참만에 방문했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우리가 선물해 드린 훈민정음 넥타이를 매시고 당신 집 대문앞에서 기다리셨다가 ‘my family’하시면서 환영해 주셨다. 큰 딸이 연말에 한국에 다녀온다고 하니 당신도 데려가 달라고 하시다가 이내 ‘나는 이제 비행기 못탄다’ 하시면서 시무룩해 지신다. 헤어질 때는 사과를 싸 주시면서 ‘나를 잊지말라’고 당부하셨다. 크리스마스 때 작은 선물을 들고 우리 가족이 방문했는데, 12월 31일 네덜란드 전통음식 ‘oliebollen’ 을 직접 갖고 찾아 오셨다.

할아버지 집에 걸려있는 태극기

처음 만났을때 자신이 한국사람이라고 하셨던 할아버지 집에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할아버지의 한국 사랑

한국전에 두 번이나 참석하셨던 할아버지는 이제 남은 기억이 한국밖에 없는 듯하다. 뉴스에 한국이야기가 나오면 관련 기사(북한 포함)는 모두 스크랩을 해 두셨다.

삼성, LG, 현대 등 네덜란드에 진출한 한국업체 이야기가 나오면 ‘넘버원 코리아’를 외치신다. 60년 전 당신이 목숨걸고 지켜낸 대한민국이 그 숱한 어려움을 모두 털고 세계의 으뜸가는 모범국가로 발전했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하실까? 대한민국에 관련된 것은 모두 예뻐 보이는, 거의 맹목적이신 할아버지시다.

팀 보스(Tim Vos) 할아버지와 헤이 보스(Ge Vos) 할머니 부부
처음 방문한 날, 할아버지는 들떠서 당신의 한국 사랑을 끝없이 보여 주셨다.

할아버지가 전쟁 후에 한국을 방문하셨던 때가 1970년대 말이었다고 하니 또 그후의 한국이 궁금하실 것 같아, 집사람이 발전된 한국모습, 컴퓨터에 담아 설명드렸다. 화려한 서울의 모습, 세계 제일의 인천공항, 아파트 빌딩숲 등. 연방 엄지를 치켜 세우며 좋아 하셨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형 태극기 5개를 선물했는데, 하나는 현관에, 또 하나는 큰 길쪽 창가에 두시고 누구나 알아보게 하셨다.

한번은 한국 지인이 어린 애기를 데리고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이른 아침 요란스럽게 벨을 계속 누르는 사람은 역시 할아버지 셨고, 애기를 본 할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눈물을 훔치시면서, 한국전 때 이런 어린애가 ’I am hungry’라면서 배고파했다는 말씀. 모든 사고와 행동에 ‘기승전한국’이다.

설명절을 전후해서 ‘해외상주연구원 연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하기 전에 할아버지께 부탁사항을 여쭤 보았는데, 태극문양 버클의 허리띠를 원하신다. 사진을 보여 주면서, 친구들이 한국방문 때 받았던 것인데, 당신은 한국에 가질 못했단다. 한국에 관한 한 단 하나라도 부족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신다. 

● 한국 학도병 곽경찬 회장과의 만남

한국전쟁 당시 네덜란드 부대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곽경찬 회장이 한국전 60주년 행사참석을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팀 보스할아버지와 곽경찬회장
곽경찬회장과 네덜란드 참전용사회 슈뢰더회장. 슈뢰더회장 등 참전용사들은 네덜란드군이 머물렀던 삼일공고(경기 수원시)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모금해 오고 있다.

2010년 2월, 팀보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때 우연찮게 통화를 했던 곽경찬 회장님을 수원역에서 만났다.
연찬회 참석차 일시 귀국했다가 할아버지가 원했던 태극문양의 허리띠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어 전날 오후에 전화를 드렸던 건데, 제주도에서 골프 운동중이셨던 회장님은 당장 올라 오신다고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얼마나 옛 전우들의 소식이 그리우셨을까? 처음 뵌 곽 회장님은 탄탄한 체구에 아직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셨는데, 19세에 학도병으로 네덜란드 부대에 배치되어 기관총 탄약수, 부사수 등으로 활약하면서 미국동성훈장을 탔다고 하셨다.
태극무늬 버클의 허리띠를 말씀 드렸더니 시중에서 살수 없는 물건이라면서 구해보겠다고 하셨다. 이 허리띠는 3월 하순에 할아버지께 우편으로 전달되었는데, 엄첨 좋아하셔서 허리띠 맨 사진을 찍어 회장님께도 보내 드렸다. 6월에 네덜란드에서 진행하는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네덜란드로 복귀한 후 행사를 준비하는 첨전용사협회와 한국대사관에 연락하면서 곽 회장님의 입국을 준비하였고, 헌화할 화환(wreath)도 주문했다. 회장님은 또 사비를 털어 선물을 챙겨 오셨고, 거의 60년만에 옛 기관총 사수였던 폴란드 출신 미깐스키를 만났는데, 당시 부대에서 세명(소대장, 사수, 부사수)만이 받았던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알아본 결과였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도 잠시, ‘네가 미깐스키냐’며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메였다.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던 회장님은 미깐스키의 주소와 연락처를 건네 주시며 어렵게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분에게 연락을 취해달라고 하셨다. 이후 미깐스키 씨는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 찾아간 주소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빈곤한 형편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회장님의 말씀을 빌리면, 행사에 나오지 못하는 전우들은 몸이 아프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2년 가까운 상주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회장님과 함께 횡성 참전기념비를 찾기도 했고, 서울의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끔은 농장에서 수확한 고구마를 보내 드린다. 후배들이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이... 벌써 또 10년이 지나 70주년이 되는 올해. 이제 88세가 되셨는데, 전화를 받으시는 목소리가 힘이 없으시다. 봄에 다친 발목 부상이 아직도 회복이 안되어 거동이 어렵다는데, 빨리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어야 병문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쾌차하셔서 함께 네덜란드 참전비도 다시 방문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팀보스할아버지와 신학기박사의 부인 최서열 여사.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네덜란드 판하우츠연대의 한국전 전사자 추념탑

2017년 5월 주한네덜란드대사관 주최로 횡성군청에서 열린 6.25참전네덜란드대대 사진전

한국전쟁 60주년에 맞추어 네덜란드 현지에서 참전용사들을 위로하고 고마움을 전하는 행사가 2010년 6월 1일, 참전부대(Arnhem에 위치한 ‘판 하우츠’ 연대)에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부대에 연락해서 초청장을 받아 주셨는데, 행사 하루전에 도착하신 곽 회장님과 함께 이동하였다. 개관한지 막 10일이 된 부대내의 ‘네덜란드 625전쟁 박물관’을 둘러 보았는데,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참전용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기증한 유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고 한다. 시간이 되자 행사장은 노병들로 가득했는데, 가만히 보면 노병뿐만이 아니다. 남편이 한국전에서 전사하신 분, 오빠가 전사하신 분, 동생이, 또 아버지가... 저마다 가슴 저미는 절절한 사연들을 안고 있다. 축사와 헌화 등 행사가 마무리될 즈음, 마침내 완전히 동화되어 친숙한 아리랑을 목메어 합창했다. 모두들 20대 초반에 참전을 했을텐데, 이제 모두 백발의 80대가 되어 이 자리에 섰으니 감흥이 어떠하실지 짐작이 안 간다.  

할아버지는 아리랑을 부르면서 또 우셨다. 이 행사에 초대하면서 집사람더러 꼭 한복을 입고 오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석한 네덜란드 분들이 너무 좋아하셨다. ‘한복’이라고 정확하게 이름도 알고,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하면서... 베네콤에서 왔다고 하니까 Oh! Vos family.. 라고 알아준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을 하셨을지?

한국음식으로 만찬이 무르익을 무렵, 일부 노병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모금함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에 한국에 들어온 네덜란드 파병부대는 본격 투입 이전인 12월 4일 수원시 삼일 중학교(현 삼일공고)에 도착해 적응 준비를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1985년 다시 방문했을 때, 이 건물이 헐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참전용사협회장인 슈뢰더스 씨는 이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고, 결국 건물을 보존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은 1989년부터 추억을 간직해준 학교에 감사의 표시로 매년 2~3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약 3,000유로)을 지급해 오고 있다. 장학금은 회원들의 회비(14유로)와 참전용사 가족의 장례식 때마다 설치하는 ‘삼일공고 학생을 위한 장학금 모금함’을 통해 마련해 오고 있단다.

가슴이 먹먹해 온다. 누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고, 누가 보은을 해야 하는지? 지팡이를 짚고 노구를 이끌며 힘겹게 동전 한 잎을 모금함에 넣는 저 손길은 진정 천사가 아닐까? 어쩌면 대한민국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구해낸 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한 가족이 되다

2010년 새해 들면서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정례화 하기로 했다. 한달에 한 두 번의 만남으로는 도저히 할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채울수가 없을 듯 해서였다. 집사람이 매주 화요일 10시에 할머니(헤이 보스 = Ge Vos)에게 네덜란드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기로 했는데, 어림없다. 네덜란드어 교육도 친히 할아버지께서 나서셨다. 이후 이 교육은 생활교육으로 변질(?)되었는데, 추억의 한국이야기는 필수이고, 가족사, 국가 연금체계와 결혼식/생일 문화, 네덜란드 요리, 지역 현장방문 등 할아버지의 모든 요구를 다 포함하는 종합교육이 되었다. 10시에 시작하였으니 점심식사는 기본이 되었고, 네덜란드 전쟁 기념관과 주요 문화유적지 탐사, 할아버지의 고향에도 방문했으니 2∼3시간의 수업이 하루 종일의 출장(?)이 되기가 예사였다. 돌아올 때는 늘 과일이랑 먹을 것을 싸 주셔서 집사람은 친정 다녀오는 것 같다고 했다. 부담없이 오파(아빠), 오마(엄마)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5월 5일 네덜란드 승전일에는 우리 가족들을 행사에 초대해서 참전용사들에게 일일이 소개해 주셨고, 전우들과 그 가족들의 애끓는 사연도 들려 주셨다. 

Vos 부부의 결혼 50주년 기념식에 함께한 신학기 박사 가족

Vos 부부의 결혼 50주년 기념식에도 불러 주셨고, 심지어 Nunspeet에 위치한 두 부부의 장래 묘지까지 알려 주셨다. 2주간의 여름휴가 때에도 귀가 시간에 맞춰 과일을 들고 집을 방문하셨고, 한국에 집을 정리하느라 일시 귀국했다가 돌아갔을 때에도 꽃다발을 준비해서 ‘웰컴백’을 외치셨고, 급기야는 두 딸(지인, 지영)을 상속녀로 삼아 주셨다. 이제 이웃들은 한국에서 온 Vos family를 누구나 알아보게 되었다. (2)편에 계속

 

최상환 기자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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